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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남권희 교수‘고려 조선 필사본’ 발표 ? ?“예술로 승화된 공양과 공덕의 결정체” 작성일 2019-01-30
작성자 관리자 조회 611


“예술로 승화된 공양과 공덕의 결정체”
남권희 교수‘고려 조선 필사본’ 발표 

 


 


남권희 교수

 

 

 

 

 


불교학연구회,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워크숍

초기에는 경전 보급하는 수단 세월 흐르며 신앙과 찬탄으로
고려 사경원, 조선 승문원에서 국가 차원 사경 인력 양성 활용

“초기에는 경전을 서사(書寫)해 널리 보급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됐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단순한 사본(寫本)의 개념을 넘어 종교적 신앙과 찬탄, 그리고 장엄이 예술적으로 승화된 공양과 공덕의 결정체로 나타났다.” 남권희 경북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지난 1월25일 금강대에서 열린 불교학연구회(회장 최종남) 겨울워크숍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이날 겨울워크숍은 불교학연구회와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소장 김성철)가 ‘천년을 이어온 불교기록문화에 대한 현황과 과제’라는 주제로 마련했다.

이날 남권희 경북대 교수는 ‘고려·조선시대 불교문헌 필사본의 경향과 특징’이란 주제발표를 통해 “사경 신앙의 근본은 1자(字) 1불(佛)의 신앙 형태로 표출됐다”면서 “경전의 한 글자 한 글자가 바로 부처님이라는 공경스러움을 담았다”고 밝혔다. 한 자 한 자 경문(經文)을 쓰고 변상도(變相圖)를 그리는데 정성을 다 바쳤다는 것이다.

남권희 교수는 “사경이 불경(佛經)을 널리 보급시킨 유일한 수단이었다”면서 사경의 세 가지 목적을 밝혔다. 첫째, 후손에게 불경을 전달하고, 둘째, 스님들이 독송하며 연구하고, 세쨋, 서사(書寫)의 공덕 때문이란 것이다.


 

 

 

 

 

 

 

 

 

 

고려시대 사경의 특징에 대해선 개인들은 복락(福樂)과 안녕(安寧)을 기원하고, 국왕들은 주로 원(元) 간섭기에 조성했는데, 개인발원 사경보다 정교함이 뛰어나다고 했다.

고려 시대 성행한 국왕 발원경(發願經)은 주로 국왕의 발원을 전문 사경승(寫經僧)에 의뢰해 만들어졌다. 남권희 교수는 “본문 글씨나 표지 장식, 제본이 정교하다”면서 “권수의 서명 아래에 천자문 함차(函次, 차례와 비슷한 의미)와 경전의 권별 순서를 표시했다”고 지적했다. 이는 개인 발원경과 구별되는 특색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개인 발원경은 전문 사경승에 의뢰하기도 했지만 개인이 직접 사경한 사례가 많다. 특히 고려 시대 귀족 중심의 금은자(金銀字) 사경이 성행했다는 것이다. 남교수는 “사경에 동참하는 사람의 관직, 품계 등이 수록됐으며, 사경을 통한 신앙 형태와 사회상, 인물을 살필수 있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고려시대에는 사경원(寫經院)을 설치해 운영했다. 과거에서 명업원(明書業)을 통해 선발한 인재들이 참여했으며, 주로 금은자 대장경(大藏經)을 서사(書寫)하고, 교장의 등재본을 썼다. 사경원 책임자는 종오품에 해당하는 판관(判官)이 맡았다. 기록을 통해 확인된 사경원 판관은 최함(崔?, 1117년), 김지우(金之祐, 1152년), 최언방(崔彦方, 1158년 이전), 최광균(崔光鈞, 1160년 이전), 진광인(晉光仁, 1171년), 최증(崔?, 1187년 이전), 권상(權庠, 1340년 이전) 등이 있다. 사경원은 충렬왕(忠烈王, 1274년∼1308년 재위) 대에 이르러 금자원(金字院) 또는 은자원(銀字院)으로 불렸다. 이 때는 스님들을 필사자(筆寫者)로 선발해 금자, 은자 사경을 감독하게 했다.

 

 

 

 

 

왼쪽부터 이종수 교수, 이영진 교수, 남권희 교수, 승범스님

 

 

 

조선시대 들어서도 사경의 전통은 이어졌다. 조선 초기에는 중국 송판본 계열의 책을 자본(字本)으로 활자를 주조하고, 세조(世祖) 이후에는 세조나 본국인(本國人, 조선인)의 글씨가 자본으로 채택됐다. 남권희 교수는 “17세기 이후는 중국 서체의 영향으로 인서체(印書體)가 도입됐는데, 간혹 역대왕 이나 본국인의 글씨로 된 활자도 있었다”고 밝혔다. 글자 크기는 특대(特大), 대(大), 중(中), 소(小), 특소자(特小字)로 구분할 만큼 용도에 따라 다양했다.

고려시대 사경원과 비슷한 기능을 담당한 기관으로 승문원(承文院)이 있었다. 승문원은 왕의 교서(敎書)나 국가의 외교문서 작성을 전담한 기관으로 이곳에서 서사자(書寫者)들이 활동했다. 〈조선왕조실록>의 중종 당시(1539년) 기록에 따르면 “승문원의 사기관(寫記官)'은 운문서(韻文書)를 정서하거나 글 쓰는 사람을 양성하기 위한 기관”이란 대목이 나온다. 남권희 교수는 “숭문원 서사자는 사전에 필재(筆才)가 뛰어난 동몽(童蒙, 어린아이)과 학생을 선발해 ‘이습(肄習)’ 자격을 부여해 적정기간이 지나면 기존 사자관 등에 결원이 있을때 발탁한다”고 밝혔다.

 

 

 

 

 

 

 

 

 


이밖에도 이날 불교학연구회 겨울워크숍에서는 ‘인도어 사본 연구 현황과 과제(이영진, 금강대)’와 ‘조선후기 연담과 인악의 화엄십지사기 비교(승범스님, 동국대)’ 등의 연구결과도 발표됐다. 첫날 주제발표와 종합토론에 이어 둘째날인 1월26일에는 제6교구 본사 마곡사와 계룡사 갑사를 답사했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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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7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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